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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 4·3사건 69년전 제주에서는 무슨일이 있어났던 걸까요?
    역사 그루터기 2017. 4. 7. 23:03

    제주도 하면 무엇이 생각나세요? 한라산? 유채꽃? 돌하르방? 오름? 

    이번 포스팅에는 제주 4·3사건에 대해서 소개하는 글을 써보려 합니다. 아울러 이번 주 한글 학교에서도 우리반 아이들에게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해 알려주려고 합니다.




    "69년전 제주에서는 무슨일이 있어났던 걸까요?"


    역사적 배경

    광복직후 우리나라는 미군정 시기였습니다. 미군정이 모냐구요? 해방 후 미국 군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혼란을 수습하고 다스린 것을 말합니다.


    한국의 군정기(軍政期)는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독립이 확정된 한반도를, 북위 38도선 이북에서 소련군이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수립 전까지, 38도선 이남에서는 미군이 1945년 9월 9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까지 다스린 기간을 총칭한다.

    출처: 위키피디아

    제주도는 어땠을까요? 대부분의 사람이 직장이 없어 힘들어했고, 흉년이 계속되어 양식과 생필품조차 부족했습니다.콜레라 등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기도 했지요. 

    정부의 여러 정책은 실패하였습니다. 미군정에서 일하는 관리들은 국민을 생각하기 보다는 자신의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 참으로 혼란스러운 하루하루였습니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서 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경찰이 타고 있던 말에 한 아이가 치인 것입니다. 그걸 본 사람들이 거칠게 항의했지요. 

    그 때 경찰은 구경꾼들을 향해 총을 발포하였습니다.

    "탕! 탕 ! 탕! "  커다란 총성이 울렸습니다.

    사람들이 총에 맞아 하나 둘 쓰러졌습니다. 구경하러 나온 죄없는 사람 6명이 숨지고 6명이 다쳤습니다.

    죽은 사람 중에는 젖먹이를 안은 여인도 있었고, 제주북교 5학년 학생도 있었습니다.

    정말 안타깝지요..

    경찰이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고, 또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이 그 총에 맞아 죽는 것을 옆에서 본 제주 도민들은 분노할 수 밖에 없었겠지요. 

    선량한 제주 도민들도 경찰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찰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민·관 총파업이 이어졌지요. 

    미군정은 이 총파업이 생긴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경찰 발포에 대해 사과하거나 이에 관련된 사람을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남로당이 뒤에서 조정하고 부추겼다고 생각하고 강하게 밀어 부쳤지요.

    남조선로동당 줄여서 남로당은 1946년 11월 23일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의 합당으로 결성된 공산주의 정당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의 지도자들은 모두 해고되었고 새로운 사람들로 교체 되었습니다. 

    경찰과 서북청년회원 등을 대거 제주로 보내서 파업 주모자를 찾아 감옥에 넣었습니다.

    서북청년단(西北靑年團)는 미군정 당시 조직된 대한민국의 극우 반공주의 청년 단체로 반공주의 청년단체였다.

    출처: 위키피디아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1년 동안 2,500명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특히 서북청년회는 선량한 도민들에게 나쁜 짓을 많이 했습니다. 마음대로 사람들을 괴롭히고 물건을 빼앗기도 했지요. 사람들은 무섭고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들도 끔찍한 일을 많이 겪었는데요. 경찰의 고문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1948년 3월 일선 경찰지서에서 세 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고문으로 사람들이 죽은 것이지요. 제주사회는 금방 폭발할 것 같은 위기상황으로 변해갑니다.

    1948년 4월 3 새벽 2시. 총성과 함께 한라산 중허리의 오름마다 봉화가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올랐습니다. 

    참다 못한 사람들이 경찰과 서북청년단에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350명의 무장한 사람들은 이날 새벽 12개의 경찰지서와 서북청년당 사람들의 집을 공격했습니다. 

    사람들이 요구한 것은 선량한 시민을 괴롭히지 말것, 남한만 구성된 선거를 하지 할 것, 남한만의 정부를 세우지 말고 통일된 정부를 구성하라는 것이 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요. 

    미군정은 이를 보고 더 많은 경찰과 서북 청년단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의 저항을 계속하였지요. 이윽고 군대가 제주도에 보내졌습니다. 그리고 선거를 실시했지요. 5·10 선거입니다.

    1948년 5월 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는 사람들이 투표를 하지 않았습니다. 아까 말한 대로 남한만의 정부를 세우지 말고 통일된 정부를 원하는 목소리를 낸 것이지요. 결국 제주도가 남한에서 유일하게 5·10 선거를 거부한 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선거가 끝나자 본격적으로 제주도 사람들은 정부의 탄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미 제주도는 이승만 정부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낙인찍혔지요. 남한만의 정부를 거부하고 통일된 정부를 세우자고 했으니깐요.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대를 제주도에 더 많이 보내기 시작합니다.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명령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까닭없이 정든 고향을 떠나 해변마을로 강제로 이사해야만 했습니다..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됩니다. 계엄령이란 국가 비상사태 때 대통령이 군대를 이용해 강제로 나라의 질서를 유지하겠다고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할 때는 국회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대통령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하지만 이때는 대통령이 독자적으로 계엄령을 선포하여 위법 논란이 있습니다. 어쨋든 정부는 군대를 보내 해안 지역이 아닌 중산간 지대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여버립니다.  

    11월 중순께부터 이듬 해 2월까지 약 4개월 동안, 군대는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죽였습니다. 

    중산간 지대에서 뿐만 아니라 해안마을에 살고 있던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희생되었습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가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습니다. 이들은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 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습니다. 

    4개월 동안 진행된 군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불에 타 사라졌고, 마을 자체가 없어져버린 이른 바 ‘잃어버린 마을’이 수십 개에 이르게 됩니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새로운 작전이 전개됐니다. 신임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정책을 발표하지요.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했고,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습니다. 1949년 6월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사라집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또다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됩니다.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붙잡혀 집단으로 처형되었지요.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재판 없이 사형당합니다.

    4 3 사건으로 죽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통계마다 차이가 있는데요 적게는 14000명에서 많게는 68000까지 희생 당했다고 합니다. 정말 참혹합니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 4·3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비로소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 후 40년이 넘게 이 끔찍한 사람들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갑니다. 물론 제주 도민과 희생 당하신 분들의 가족 분들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참혹한 과거였지요. 


    http://jejupark43.1941.co.kr/index.php

    2000년 1월에야 「4·3특별법」(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공포되고, 이에 따라 8월 28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설치되어 정부차원의 진상조사를 실시합니다. 

    2003년 10월 정부의 진상보고서(『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고, 대통령의 공식 사과도 이루어졌습니다. 4·3평화공원도 가까스로 조성되었습니다.

    제주도에 가게 되면 꼭 가보아야 할 곳인 것 같습니다.

    진상보고서에 의하면, 4·3사건의 인명 피해는 25,000∼30,000명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강경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9,285동이 소각되었습니다. 

    뼈아픈 현대사의 단면이지만 한편으론 기억해야 할 우리의 역사. 되풀이 되서는 안되는 역사가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자료를 조사하다가 설민석 선생님의 유투브 영상 댓글이 눈에 띄어 소개해 드리면서 글을 마무리 할까 합니다. 

    "저는 제주도에 사는 학생입니다. 저희 외할머니께서는 4 3 유족이십니다."

    "저희 외할머니 3살 때  아버지를 잃으셨습니다. 저희 외할머니께서는 본 기억도

    손길을 느껴본 기억이 없으시지만 4 3 평화공원과 묘지를 가면 어찌나 우시던지 

    가슴이 미어집니다. 4 3 공원 사람 정말 없습니다. 한 번이라도 봐 주셨으면 합니다."





    [Daum백과] 제주 4·3사건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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